
다시 주어진 아침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다음 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면.
익숙한 방에 익숙한 숨소리가 있고,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말이 아침 햇살을 건너 다시 들려온다면.
우리는 무엇부터 하게 될까.
처음에는 그저 확인하려 들 것이다. 정말 살아 있는지, 지금이 언제인지, 어제의 일이 꿈이었는지. 그리고 되찾은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이고 나면, 머릿속에는 다급한 지도가 펼쳐질 것이다.
어느 길을 피해야 하는지. 몇 시에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사랑이 돌아온 자리에 가장 먼저 달려드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한 계산일지 모른다.
영화 《이프 온리》에서 이안에게 주어진 두 번째 하루도 그렇게 시작된다. 연인 사만다를 사고로 잃은 그는 다시 그녀와 아침을 맞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이미 그날 밤의 비극이 와 있다.
눈앞에는 살아 있는 사만다가 있고, 머릿속에는 그녀를 잃었던 순간이 있다. 그녀가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그는 다음 사건을 기다린다. 곁에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 몇 시간 뒤로 달려간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보다 그를 잃지 않을 방법에 더 오래 마음을 쓰곤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미루던 마음, 사랑을 붙잡는 마음
첫 번째 하루의 이안에게도 사랑은 중요했다. 다만 다른 중요한 일들을 정리한 뒤에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일이 안정되면. 이번 일정이 끝나면. 조금 덜 바빠지면.
그의 마음속에서 사랑은 늘 다음 칸으로 옮겨진다. 사만다는 곁에 있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머물 자리는 다른 일들로 먼저 채워져 있다.
우리는 관계를 지키기 위해 일하고, 함께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딘다. 그러는 사이, 그 미래를 함께 살아갈 사람의 오늘을 놓친다.
상대는 잠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해결책을 건넨다. 함께 기뻐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고 왔는데 가능성과 위험부터 따진다.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묻기도 전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한다.
어느새 사랑도 관리해야 할 과제가 된다. 충분히 준비하면 지킬 수 있고, 잘못된 변수를 없애면 오래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두 번째 하루의 이안은 사랑을 더는 미루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사랑하는 사람보다 통제해야 할 상황이 먼저 보인다.
사랑을 미루던 마음이 사랑을 붙잡는 마음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눈앞의 사람을 비껴간다.
첫날에는 일이 끝난 뒤에 사랑하려 했다. 둘째 날에는 위험을 모두 없앤 뒤에 안심하고 사랑하려 한다.
그렇게 사랑은 번번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으로 미뤄진다.
운전석을 차지한 승객
휴먼디자인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여행에 비유한다.
몸은 차량이고, 자기 단극자는 운전사이며, 퍼스널리티 크리스탈은 승객이다. 이 체계에서 자기 단극자는 디자인과 퍼스널리티를 하나로 묶어 한 존재의 삶이 성립하도록 하고, 그 존재를 고유한 기하학적 경로로 이끄는 것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기하학은 삶이 움직이며 사람과 장소, 사건을 만나는 궤도를 뜻한다.
승객에게는 창밖을 바라볼 의식이 있다. 지나온 경험을 기억하고, 의미를 발견하며,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승객이 자신을 운전사라고 믿기 시작하면 여행의 성격이 달라진다.
길이 예상대로 이어질 때는 자신이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뜻밖의 일이 닥치면 운전대를 더 세게 움켜쥔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빨리 판단해야 하며,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가짜 핸들’이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능력에, 삶 전체를 지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덧씌워진 것이다. 마음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긴장한다.
이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면 비극도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두 번째 하루에는 되풀이되는 사건과 달라지는 상황이 뒤섞인다. 사건의 순서까지 완전히 같지는 않으며, 마지막에는 사고가 반복되면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읽는 기하학은 모든 장면이 똑같은 순서로 재생된다는 뜻보다, 그의 계산을 넘어 되돌아오는 만남과 사건의 무늬에 가깝다.
그럼에도 되돌아오는 사건들은 그의 확신을 흔든다.
미래를 안다는 것만으로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아는 만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마음이, 자신의 앎보다 넓은 삶을 만나는 것이다.
선택권 없음이라는 낯선 문턱
레이브 우주론의 ‘선택권 없음’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선택하는 사람이 곧 자신이라고 배워 왔다. 충분히 생각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면 원하는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체계는 ‘내가 삶을 운전한다’는 그 전제 자체를 묻는다.
이 관점에서 선택권 없음은 삶의 일부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인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선택하는 주인이라고 여겨 온 ‘나’의 자리까지 흔든다. 내가 선택했다고 설명하는 그 마음마저 삶의 움직임 안에서 나타난다는 물음이다. 승객의 의식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경험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의식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항복은 무엇인가.
마음은 곧바로 새로운 과제를 만들 수 있다. 이제부터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완벽하게 내려놓아야 한다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승객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항복을 잘해야 한다’는 다짐 속에서도, 바로 그 손이 다시 핸들을 쥐고 있을 수 있다.
항복은 오히려 그 손에 들어간 힘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결과만은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 믿는지, 그 결과를 위해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그 자각이 깊어지면,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경험에도 다른 여지가 생긴다. 삶 전체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짐에도 틈이 생긴다.
삶은 그 자리에서도 계속 움직인다. 몸은 필요한 일을 하고, 위험을 줄이며, 도움을 구한다. 다만 그 모든 행동으로 결과까지 보장받으려 했던 마음의 요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안에게도 그런 틈이 열린다.
그 틈으로 사만다의 얼굴이 다시 들어온다.
택시기사가 가리킨 곳
영화 속 택시기사는 이안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다. 그의 불안을 꿰뚫어 보면서도 비극을 피할 상세한 지도를 건네지는 않는다.
그가 거듭 일깨우는 것은 사만다를 소중히 여기고, 곁에 있는 그녀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 인물을 자기 단극자의 ‘운전사’라는 이미지와 겹쳐 읽을 수 있다. 그는 이안이 운전석을 차지하려 애쓰는 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려놓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가.
함께 있으면서, 실제로 그녀에게 가닿고 있는가.
이안의 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를 향한다. 택시기사의 말은 그 눈을 살아 있는 사만다에게 되돌려 놓는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다. 웃고, 서운해하고, 음악을 사랑하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
예측해야 할 사건들 사이에서 잠시 사라졌던 얼굴이다.
택시기사를 자기 단극자의 상징으로 읽을 때, 그의 역할도 선명해진다. 그는 미래의 해답을 건네기보다, 그 미래를 두려워하는 승객이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구하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방향과 사랑이 만나는 자리
휴먼디자인에서 G 센터에는 사랑과 정체성, 방향이라는 주제가 모인다. 그 안에 자리한다고 설명되는 자기 단극자는 존재를 하나로 유지하고 고유한 궤도로 이끄는 기능을 맡는다.
이 기능을 곧바로 낭만적 사랑의 감정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에 비추어 보면 사랑과 방향이라는 두 주제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자신의 계획 안에 두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고유한 길과 속도가 있음을 받아들일 때, 사랑에는 더 넓은 자리가 열린다.
우리는 상대가 기대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안심하고, 예상 밖의 곳을 바라보면 불안해진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선택과 침묵, 속도까지 대신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는 과정에는 내가 끝내 알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시간도 들어 있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기뻐한다는 것. 나의 설명만으로 슬픔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나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와 세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안은 사만다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동시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음악과 바람이 그의 하루 안에서 더 넓은 자리를 얻는다.
그에게 사랑은 조금씩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함께 걷고, 감춰 왔던 이야기를 꺼내고, 상대가 소중히 여기는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항복한 승객에게도 표현은 남는다.
휴먼디자인에서 마음의 외적 권위는 자신의 관점과 통찰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역할을 뜻한다. 사랑의 고백 자체와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이안의 변화에서는 삶을 관리하느라 묻어 두었던 말이 관계 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 그동안 충분히 곁에 있지 못했다는 고백. 오늘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그 말들이 미래를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분명히 가닿는다.
탄트라라는 이름을 지나, 함께 앉는 식탁으로
영화 속 식당의 이름 하나도 이 변화에 여운을 더한다.
탄트라.
이안이 예약해 둔 식당이다. 이 이름을 영화의 종교적 상징으로 읽은 연구도 있다. 탄트라는 여러 종교 전통에 걸쳐 발전한 수행과 의례의 세계를 가리키며, 그중 일부 전통은 몸과 감각의 경험을 영적 변형의 통로로 바라본다.
이 이름이 불러오는 여운을 따라가면, 영화의 사랑은 몸과 감각이 살아 있는 자리로 가까워진다.
함께 음식을 먹고, 표정을 살피고,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감추던 사람이 마음을 드러내고, 상대의 기쁨이 자기 안에 들어올 자리를 내어 준다.
여기에는 작은 이동도 있다. 두 번째 하루의 마지막 식사는 이안이 예약한 탄트라가 아니라 사만다가 고른 아늑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처음의 이안에게는 준비해 둔 일정이 있었다. 예약하고 시간을 조정하고 선물을 마련하는 일은 그가 사랑을 돌보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 하루의 그는 그 계획에 상대의 바람을 들인다. 그녀가 머물고 싶은 곳으로 가서 함께 앉는다.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던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듣는 자리가 생긴 것이다.
이 식탁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음이라는 말이 일상의 감각 속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떠올린다. 한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함께 있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일로 가까워진다.
승객의 항복에도 그렇게 온기가 더해진다.
창밖을 바라보는 의식은 몸을 통해 삶을 경험한다. 맛을 느끼고, 온기를 감지하고, 누군가의 존재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린다.
가짜 핸들을 내려놓은 뒤에도 삶은 끊임없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제야 평범한 한 끼의 식사가 얼마나 풍부한 만남이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밤 11시, 마음의 일정표가 끝나는 자리
영화에서 밤 11시는 사고와 결부된 시각으로 되돌아온다. 깨진 이안의 시계가 11시를 가리킨다는 대사까지 겹쳐지면서, 그 숫자는 하루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글에서 밤 11시는 숫자의 비밀보다, 이안이 알고 있는 하루의 끝을 가리킨다. 그의 마음이 아직 넘어가 보지 못한 문턱이다.
처음에는 그 문턱을 피하기 위해 하루의 모든 순간을 사용하려 한다.
아직 오지 않은 11시가 이미 아침과 오후를 차지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다. 결과가 발표되는 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밤, 중요한 만남이 예정된 오후.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다른 무엇도 제대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이다.
미래의 한 지점이 현재를 온통 차지하면, 우리는 오늘을 보내면서도 오늘을 살지 못한다.
이안의 변화는 그 하루 안에서 일어난다. 두려움이 남아 있는 가운데서도 그는 사만다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시계의 시간은 줄어든다. 두 사람 사이의 경험은 풍부해진다.
하나는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려 주는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 낸 시간이다. 짧은 대화가 오랜 침묵을 풀기도 하고, 잠깐의 포옹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남은 시간을 늘리려 애쓰던 이안은, 마침내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기하학이라는 언어를 여기에 비추면, 밤 11시는 승객의 마음이 끝내 소유할 수 없는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경계 앞에서 질문이 달라진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나는 누구와 어떻게 함께 있을 것인가.
언젠가 말하겠다고 했던 마음.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듣겠다고 했던 이야기.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저녁 식사.
그 모든 것에 유한한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하나의 시각으로 우리 앞에 놓는다.
멈춘 시계와 작은 팔찌
이안의 시계와 사만다에게 건네는 팔찌는 모두 손목에 놓인다.
하나는 시간을 측정한다. 다른 하나는 함께한 경험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품는다. 음악과 바이올린, 그날의 기차 여행과 가 보고 싶어 했던 장소가 작은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시계는 묻는다.
지금 몇 시인가. 얼마나 남았는가. 늦지 않았는가.
팔찌는 기억을 불러온다.
너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 이 길을 함께 왔다. 나는 네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시간표는 우리의 움직임을 정돈한다. 기억은 그 움직임 속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안의 선물이 마음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사만다라는 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구체적인 사물로 전한다.
너를 보고 있었다는 것.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는 것.
사랑은 그렇게 한 사람을 세심하게 바라보는 태도로 드러난다.
운전사인 척하는 데 온 힘을 쓰던 마음이 물러설 때, 승객에게는 창밖의 풍경이 더 자세히 보일 수 있다. 곁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도 더 선명하게 들릴 수 있다.
그때 삶의 궤도는 추상적인 선을 넘어, 실제로 지나온 만남의 무늬로 다가온다. 나눈 말과 함께 걸었던 길, 당시에는 사소하게 여겼던 표정들이 그 길에 남는다.
시계의 숫자는 마지막 순간을 가리킨다. 팔찌의 작은 장식들은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풍부한 하루를 살았는지 기억하게 한다.
영화는 이 두 사물 사이에서 우리를 마지막 택시로 데려간다.
마지막 택시, 사랑이 몸짓이 되는 순간
마지막에 이안은 사만다와 함께 택시에 탄다. 충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를 끌어안는다. 이번에는 그가 죽고 그녀가 살아남는다.
이 글의 상징적 독해에서 그 몸짓은 승객의 항복을 가장 아프고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자신의 계산으로 하루 전체를 장악하려던 사람이, 끝내 다 알 수 없는 순간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향해 움직인다. 앞서 나누었던 말과 함께 살아 낸 시간이 하나의 몸짓에 모인다.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면 설명이 멎는 자리가 있다. 이안의 내적 권위를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 나는 그의 죽음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보다 그 순간 드러난 사랑의 몸짓 앞에 머물고 싶다.
그 울림을 일상으로 가져올 때, 나는 마지막 충돌뿐 아니라 그날 그가 살아 낸 시간도 함께 기억하고 싶다.
마음을 드러낸 시간. 함께 걸었던 시간. 상대의 세계를 바라본 시간.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았던 시간.
그 시간들은 마지막 비극에 앞서, 두 사람이 살아서 함께하는 동안 이미 소중했다.
우리에게 그 사실은 가까운 요청으로 다가온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랑을 표현하는 일. 곁에 있는 사람을 익숙하다는 이유로 지나치지 않는 일. 자신의 몸과 삶도 그 사랑 안에 함께 두는 일.
항복이라는 말이 삶에 남길 수 있는 온기는 그곳에 있다.
지나온 길을 지우지 않는 무구함
첫 번째 하루를 돌아보면 마음은 쉽게 판결을 내린다.
그가 조금만 달랐더라면. 일보다 사랑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그때 함께 택시에 탔더라면.
상실 앞에서 ‘만약’은 끝없이 불어난다. 지나간 장면을 반복해서 고치고, 그때의 자신에게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 자책 속에서도 가짜 핸들은 모습을 바꿔 돌아온다.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믿음. 지나간 비극까지 내 손안에 있었다는 믿음이다.
‘노 폴트, 노 블레임’이라는 언어를 여기 가져온다면, 먼저 자신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는 가혹한 비난을 내려놓는 데 귀를 기울이고 싶다. 관계에서 충분히 응답하지 못했던 몫은 돌아보되, 사고의 모든 원인까지 자신에게 돌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온 길을 바라볼 때 시행착오의 자리도 달라진다.
첫 번째 하루의 서툶과 부딪힘은 이안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드러낸다. 그는 두 번째 하루에 그것을 새롭게 알아본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만다의 고통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통을 겪은 뒤 배움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고통이 배움을 위해 배정되었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경로는 옳다’는 말을 삶의 무구함에 가까이 놓으려면, 그것을 모든 행동에 대한 승인으로 읽기보다 지나온 삶 전체를 저주하지 않는 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무엇을 몰랐는가.
지금 무엇이 보이기 시작했는가.
무구함은 어제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어제를 끝없는 재판정에 가두어 두었던 마음에 여백을 연다.
우리는 그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이 자리에서 삶을 다시 바라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반복되지 않는 저녁
《이프 온리》는 두 번째 하루를 보여 준다.
우리가 사는 하루에는 그런 기회가 약속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저녁 식탁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지 않다. 누군가는 조금 늦게 도착하고, 누군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내일의 일정을 떠올린다.
너무 익숙해서 오래 바라보지 않았던 얼굴이 건너편에 앉아 있다.
영화의 밤 11시는 무한히 반복될 것처럼 대하는 순간들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오늘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오늘 전할 수 있는 고마움. 오늘 함께 앉을 수 있는 식탁.
미래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이 시간은 지나간다.
승객의 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은 이 평범한 저녁에서 시작될 수 있다. 결과를 붙잡으려 했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아래 어떤 두려움이 있는지 잠시 살핀다.
나는 확실한 답을 받아야만 안심하는가.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를 계속 요구하는가. 불편한 대화를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가.
자신의 바디그래프를 살피는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자신의 미정의 센터에서 관찰해 온 반응과 견주어 볼 수 있다. 그때 차트는 자신을 판결하는 문서가 아니라, 마음이 핸들을 움켜쥐는 순간을 알아보는 관찰의 지도가 된다.
그 자리에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지는 응답을 살핀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을 정직하게 전하는 것일 수 있다. 기다릴 시간을 충분히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전략과 권위를 따른다는 데에는 그에 맞는 시간과 과정을 존중하는 일도 포함된다. 현재를 산다는 말 속에는 감정의 명료함을 기다리는 시간도 들어 있다.
상대의 반응까지 미리 정해 두려던 손의 힘을 조금 푼다. 마음속에서 반복 재생하던 결말을 잠시 멈추고, 실제로 들려오는 말을 듣는다.
창밖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길이 이어진다.
내가 《이프 온리》에서 읽는 항복은, 그 길 전체의 주인이 되려던 마음이 물러나 삶이 펼쳐지는 자리에 머무르는 일이다. 두려움이 다시 올라와도 그것을 알아차리며, 몸을 통해 주어지는 하루를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길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수는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오래 머물던 말을 건네며, 함께 있는 시간을 살아갈 수는 있다.
밤 11시가 무엇을 데려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시간이 오기 전,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대답을 듣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저녁이 천천히 깊어진다.
나는 내일을 붙잡느라, 오늘 누구를 놓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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