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만한 물가에서 항복을 배우다 웹진 표지
이슈하나 15 · 웹진 표지

삶을 붙들던 손이 지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오래된 고백

살다 보면 아무리 애써도 길이 보이지 않는 때가 있다. 생각을 더 많이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밤늦도록 머릿속을 헤집고, 관계가 흔들리면 어느 말에서 잘못되었는지 되짚는다. 아직 오지도 않은 위험을 미리 계산하며 불확실성을 손안에 붙들어 두려 한다. 그러나 삶은 좀처럼 인간의 손바닥 안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오래 준비한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틀어지기도 한다. 몸은 우리의 계획과 상관없이 늙고 계절은 묻지도 않고 바뀐다. 아무리 정교한 지도를 가지고 있어도 어느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그때 시편 23편의 첫 문장이 들려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너무 오래 들어 익숙해진 문장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이보다 급진적인 고백도 드물다. 목자가 있다는 말은 내가 목자가 아니라는 인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방향을 알아야 하는 것도, 모든 결과를 통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살아 낼 필요도 없다. 이 고백 앞에서 삶을 움켜쥐던 손가락이 조금씩 풀리고, 느슨해진 손바닥 위로 비로소 신뢰가 내려앉는다.

신뢰는 미래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다. 앞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음 한 걸음을 내딛는 힘이다. 나는 그 힘이 깊어지는 고요한 자리를 ‘정지점(Still Point)’이라 부르고 싶다. 움직이기 이전, 판단하기 이전, 무엇을 붙잡거나 밀어내기 이전의 자리. 시편의 언어를 따라가며 우리는 그 고요가 어떻게 쉼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항복으로 깊어지는지 만나게 된다.

1.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결핍의 마음에서 존재의 충만으로

인간의 마음은 부족한 것을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돈과 시간, 사랑과 인정, 아직 갖추지 못한 지식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하나를 채우면 잠시 안도하지만 곧 다른 빈자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만 더 가지면 괜찮아질 것 같고, 조금만 더 이해하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시편은 그 오래된 결핍의 회로 한가운데에 뜻밖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실제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안전해야 하며,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가난이나 상실 앞에서 이 구절을 손쉬운 위로로 내밀 수 없는 까닭이다. 시편이 묻는 것은 결핍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결핍이 내 존재의 전부를 규정하도록 맡길 것이냐이다. 무엇인가를 얻기 전까지 불완전하고, 누군가의 인정 없이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는 믿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정지점은 바로 그 한 걸음의 여백에서 열린다. 특별한 황홀경도,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초월도 아니다. 더 가져야 한다고 앞으로 달려가던 마음과 잃은 것을 되찾으려 뒤돌아보던 마음이 잠시 쉬는 자리다. 숨이 들어오고, 심장은 아무런 지시 없이 뛰며, 발밑에는 땅이 있다. 삶은 내가 지휘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정지점은 삶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삶을 붙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의 긴장이 멈추는 곳이다.

2. 푸른 풀밭에 눕는다는 것

성취보다 먼저 주어지는 쉼

시편은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하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은 ‘눕게 한다’는 동사다. 걷게 하거나 달리게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이루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먼저 눕게 한다.

우리는 쉬는 순간조차 쉬지 못한다. 몸은 의자에 기대어 있으면서 머리는 내일의 일을 계산하고, 여행지에서도 다음 장소를 검색한다. 명상하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명상하는지 평가한다. 영적인 길마저 또 하나의 성취가 되기 쉽다. 나는 얼마나 깨어 있는가, 얼마나 치유되었는가, 얼마만큼 내려놓았는가. 쉼을 얻기 위한 노력 때문에 쉼에서 더 멀어지는 역설이다.

푸른 풀밭에 누운 양은 풀밭을 증명하지 않고 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내려놓는다. 진정으로 쉴 수 있다는 것은 잠시 동안 삶 전체를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일이다. 내가 눈을 감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잠시 대답하지 않아도 관계 전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그 사실을 배우는 시간, 그 작은 항복이 쉼의 시작이다.

3. 쉴 만한 물가

움직이는 세계 한가운데 존재하는 정지점

물은 흐른다. 그러나 고요한 물가에 앉으면 흐름을 붙잡지 않아도 그 곁에 머물 수 있다. 시편의 물가는 정지점을 사유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미지다. 삶의 표면에서는 만남과 이별, 기쁨과 실망, 자라는 아이와 늙어 가는 부모의 시간이 쉼 없이 교차한다. 생각과 감정 또한 하나가 지나가면 다른 하나가 찾아온다.

그 모든 움직임을 잠시 바라볼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있음을 아는 자리, 두려움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자리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 자리는 경험을 거부하지 않고 파도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정지점은 파도가 사라진 바다가 아니다. 파도가 일어나도 자신이 바다임을 잊지 않는 깊이의 비유다.

그러나 이 고요를 자기 안의 능력으로만 환원할 필요는 없다. 시편에서 물가는 목자의 인도가 데려간 자리다. 내가 모든 파도를 다스려서 얻은 평온이 아니라, 인도받아 쉬는 동안 알아보게 된 평온이다. 바깥의 물가와 안의 고요가 만나는 곳에서, 나는 삶의 움직임을 멈추려는 대신 그 움직임 한가운데 머무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회복은 언제나 더 많은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치면 더욱 애쓰려 한다. 문제가 있으면 당장 해결하고, 상처가 있으면 분석하고, 불안하면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친 마음으로 다시 자신을 고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순서는 다르다. 먼저 눕히고, 물가로 데려가고, 쉬게 한다. 그런 다음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이 이어진다.

어떤 회복은 더 많은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노력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으려는 노력을 잠시 쉬는 것, 이미 끝난 장면을 마음속에서 거듭 재판하지 않는 것,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안전하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것.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하며 허락받으려는 오래된 내적 노동에 쉼을 주는 것이다.

소생은 다른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다. 본래 살아 있던 것이 다시 숨 쉴 자리를 얻는 일이다. 꽃을 억지로 피울 수 없듯 영혼 역시 힘으로 열리지 않는다. 우리는 흙을 부드럽게 하고 물이 스미도록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피어나는 일에는 생명의 몫이 있다.

5. 항복은 패배가 아니다

통제를 내려놓되 삶에서 떠나지 않는 것

‘항복’이라는 말에는 오랫동안 패배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싸움을 포기하거나 상황에 굴복하는 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항복은 체념과 다르다. 행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지배하던 두려움의 통제를 내려놓는 것이다.

필요하면 말하고, 떠나고, 경계를 세운다. 때로는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맞선다. 어떤 때에는 기다린다. 차이는 행동의 모양보다 그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있다. 두려움에 붙잡힌 마음은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만, 신뢰에 뿌리내린 마음은 지금 자신에게 허락된 한 걸음을 본다.

목자는 양에게 먼 지평선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음 발걸음이 놓일 자리를 보여준다. 항복은 길 전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면서도 그 한 걸음을 따르는 능력이다. 삶이 내 계산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삶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 그렇게 손을 펴는 일은 내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혼자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6.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정지점은 고통이 없는 장소가 아니다

시편 23편이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아름다운 초원만 노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푸른 풀밭 다음에는 골짜기가 있고, 잔잔한 물가 다음에는 어둠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시편은 그 골짜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으면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곳을 지나간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정지점은 더 깊어진다. 슬픔은 여전히 슬프고 상실은 여전히 아프다. 죽음은 인간이 끝내 다 알 수 없는 어둠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평화라 부를 수는 없다. 다만 고통 한가운데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이다.

신뢰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다. 골짜기 안에서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는다는 관계의 기억이다. 폭풍이 없는 장소를 찾아 헤매던 마음이, 폭풍 속에서 자신을 붙드는 동행을 알아보는 것이다. 정지점은 그 동행을 듣기 위해 다시 숨을 고르는 자리다.

7.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두려움을 없애는 것보다 더 깊은 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목자에 관해 말하던 시편의 목소리는 골짜기에서 목자를 직접 부르는 기도가 된다.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친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 함께 계심을 부르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시편의 중심에 놓여 있는 듯하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픔 자체만이 아니다. 그 아픔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감각이다. 누군가 말없이 곁에 앉아 주기만 해도 아픔의 질이 달라질 때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떠나지 않고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몸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 준다.

시편의 목자는 골짜기를 없애 주는 목자가 아니라 골짜기에서 떠나지 않는 목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홀로 걷지는 않는다”는 고백이 더 깊은 안심을 준다. 두려움이 사라져서 걷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심을 믿기에 두려움과 함께 골짜기를 통과한다.

8. 지팡이와 막대기

통제와 인도의 차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도구는 길을 지키고 방향을 돕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우리의 삶에도 때때로 지팡이처럼 느껴지는 사건이 있다. 열릴 줄 알았던 문이 닫히고, 기대했던 관계가 끝나며, 오래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몸이 멈추라고 말하는 순간도 있다.

그때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잘못되었다, 길을 잃었다, 삶이 나를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일 때도 있다. 닫힌 문 때문에 다른 문을 발견하고, 이별을 지나 자신에게 돌아오며, 실패를 통해 오래 붙잡아 온 삶의 방식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을 ‘다 뜻이 있다’는 말로 덮어서는 안 된다. 아픔에는 아픔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건너뛴 해석은 위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압박이 된다. 항복은 상처에 억지로 의미를 붙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 이 일의 모든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인도의 가능성에 문을 닫지 않는 겸손이다.

9. “내 잔이 넘치나이다”

풍요는 더 많이 갖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는 일

시편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이른다. 부족하지 않음에서 넘침으로. 그 사이에 세상이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푸른 풀밭과 골짜기를 함께 지나며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핍의 마음은 아직 없는 것을 묻는다. 신뢰의 마음은 이미 주어진 것을 알아본다. 따뜻한 차 한 잔, 오래된 사람의 안부, 오늘도 나를 데리고 움직여 준 몸, 저녁 창문에 내려앉는 빛, 말없이 함께 걷는 사람. 너무 익숙해져서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실제 결핍을 감상적인 말로 지우자는 뜻이 아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면서도 이미 받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정지점에 머무는 순간 새로운 소유가 생기지 않아도 풍요를 알아보는 감각이 돌아온다. 잔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넘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바빠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10. 신뢰는 미래를 아는 능력이 아니다

알 수 없음 속에서 걷는 용기

사람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 덜 두려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계획하고 예측하고 준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필요한 지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삶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이 남는다. 사랑과 관계, 몸의 변화와 죽음, 그리고 삶 자체가 그러하다.

신뢰는 미지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 안으로 걸어갈 힘을 준다. 그래서 진정한 신뢰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예언보다 “나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겠다”는 고백에 가깝다.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 기다림과 동행이라는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머리는 앞으로 펼쳐질 길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몸은 오늘의 한 걸음을 살 수 있다. 그 한 걸음이 다음 풍경을 열고, 그 풍경 앞에서 다시 다음 걸음을 묻게 된다. 삶은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보여 준다.

11. 정지점

삶과 싸우던 내가 멈추는 곳

정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한 문장이 끝나고 다음 말이 나오기 전,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아직 입을 열지 않은 찰나에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려는 생각과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사이에도 있다. 우리는 그 짧은 틈을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곳에 잠시 머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 같던 질문이 조금 조용해진다. 꼭 증명해야 할 것 같던 나 자신도 물러난다. 상대를 바꾸어야 한다는 충동과 미래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들리지 않는다. 정지점은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아직 어느 방향으로도 굳어지지 않은 충만한 침묵이다.

그 여백에서는 말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다가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익숙한 두려움에 자동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정지점에서 신뢰는 추상적인 관념을 벗어나 작은 선택이 된다. 신뢰가 깊어질수록 항복은 두려운 단어가 아니라 내가 더 큰 생명 안에 속해 있음을 기억하는 일이 된다.

12.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은 하나의 집으로 끝난다. 푸른 풀밭과 물가, 어두운 골짜기, 원수 앞에 차려진 상과 넘치는 잔을 지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집이다. 이 집은 시편 안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거하는 자리다. 묵상의 언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쫓겨나지 않을 자리,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나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을 자리로 다가온다.

우리는 사랑받으면 그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고, 성공하거나 모든 상처를 치유하면 비로소 문이 열릴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목자의 인도는 길의 끝에서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양이 풀밭에 눕던 때에도, 골짜기를 지나던 때에도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귀환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니라, 줄곧 곁에 있던 동행을 알아보는 일이 된다.

정지점은 그 사실을 기억하는 자리다. 항복은 그 집의 문을 스스로 잠그던 손을 펴는 일이다. 우리는 길을 다 알아서 집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받으며 걷는 동안 이미 돌아갈 자리가 있음을 배운다.

목자를 따라 걷는다는 것

삶을 붙잡던 손을 조금씩 펴는 연습

시편 23편은 고통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골짜기와 어둠, 상실과 죽음이 있다. 그럼에도 이 시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삶, 모든 답을 미리 알지 않아도 되는 삶,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어 숨을 쉬고, 듣고, 지금의 삶을 느낀다. 이 멈춤은 무기력이 아니다. 삶을 끌고 가려던 사람에서 인도를 듣는 사람으로, 세상을 움켜쥐려던 사람에서 세상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으로 중심축을 옮기는 일이다. 항복은 패배가 아니라 삶을 향한 깊은 신뢰가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어쩌면 이 문장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 아니다.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고백이다. 푸른 풀밭이 언제 나타날지, 골짜기가 언제 끝날지 몰라도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을 맡겨 보는 것. 내가 잠시 손을 놓아도 숨은 이어지고 밤은 새벽으로 넘어가며 씨앗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생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생명을 향해 움직인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깊은 곳에 고요가 열린다. 정지점은 삶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삶과 싸우던 내가 멈추는 곳이다. 그곳에서 신뢰가 태어나고, 신뢰가 깊어질 때 항복이 시작된다. 삶을 소유하려 했던 손을 펴고 마침내 삶 자체에 닿는 것이다.

삶으로 돌아가는 묵상

지금 내가 가장 강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놓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오늘 하루 단 한 순간이라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쉴 만한 물가에 앉아 본다면, 내 몸은 무엇을 말해 올까.

앞으로 펼쳐질 길을 모두 알지 못하면서도 오늘 내가 내디딜 수 있는 가장 작은 신뢰의 한 걸음은 무엇인가.

정지점은 삶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삶과 싸우던 내가 멈추는 곳이다. 그 고요 속에서 신뢰가 태어나고, 신뢰가 깊어질 때 항복은 패배가 아니라 더 큰 인도에 자신을 맡기는 지혜가 된다.

마이클 김종근
진키코리아 젠톨로지연구소 발행